구마라습은 법(法)을 설하여 밝히는 틈틈이, 불교와 다른 도(道)를 설하는 경서(經書)들을 연구하여 위타함다(陀含多=
베단다 : 인도 6파 철학의 하나)의 논(論)을 습득하여 수사(修辭)작문(作文) 문답(問答) 등을 널리 살피고, 다시 네 종류의 베다(圍陀) 전적(典籍)이나 다섯 가지 학술의 여러 논(論)을 두루읽었다.
음양(陰陽)·성산(星算) 따위도 완전히 연구하여 밝히고 길하고 흉한 것(吉凶)을 판단하는 술(術)도 깨달아, 그의 말은 마치
부신(符信)을 가져다 맞추듯이 딱 들어맞았다.
성격은 솔직하고 자질구레한 일에 구애되지 않았다.
그의 모든 행동이 수행자(修行者)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구마라습은 스스로 이해되는 바가 있어 남의 의심에 전혀 마음쓰지 않았다.
때마침 사거왕자(莎車王子)와 삼군왕자(參軍王子)라고 하는두 형제가 나라를 버리고 승려를 따라 사문(沙門)이 되고자 하
였다. 형은 자(字)를 수리야발타(須利耶跋陀)라 하고 아우는 자를 수야리소마(須耶利蘇摩)라고 하였다.
소마(蘇摩)는 보통 이상의 재주와 능력을 가져 주로 대승(大乘)의 처지에서 가르침을 넓히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형과 다른 여러 학자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우러렀다. 구마라습 또한 그를 종사(宗師)로서 받들어 진심으로 섬겼다.
소마는 뒤에 구마라습에게 &아달경(阿達經)'을 설해 주었다. 구마라습은 스승에게서 &오음(五陰)과 십팔계(十八界)와 십이입(十二入) 따위는 모두 실체(實體)가 없고 고유(固有)한 상(相)을 가지지 않는다." 라는 말을 듣고 이해가 되지 않아 질문했다.
"이 경(經)은 무슨 뜻을 설하려는 것입니까. 이와 같이 제법(諸法)을 부정하면서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소마가 대답했다.
"눈(眼] 같은 제법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마라습은 눈으로서의 근거가 있다고 고집하여 양보하지 않았고, 소마는 그것은 인연에 의하여 있는 것일 뿐 실체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물러서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근거가 있다고 하는 소승(小乘)과 인연에 의한 것일뿐이라고 하는 대승(大乘)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검토하여 주고받는 논쟁이 꽤 오랜 시일을 두고 계속되었다.
구마라습은 오랜 연구 끝에 겨우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로는 마음을 오로지 대승의 가르침에 따랐으며 몸소 연구에 진력하였다.
그는 뒷날 탄식하여 말했다.
"나는 지난날 소승에게 배웠으나 무엇이 금인지 알지 못하고, 놋쇠를 대단한 것으로 알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와 같이 해서 대승 강령(綱領)의 요점을 추구하여 스승으로 부터 가르침을 받아 '중론(中論)'과 '백론(百論)'의 두 논(論)
과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을 읽어 외웠다. 구자국의 왕은 구마라습을 위하여 금으로 사자(獅子) 모양을
본떠 법좌(法座)를 만들고 그 위에 대진국(大秦國: 로마 제국)
에서 생산되는 비단으로 방석을 만들어 깔고 거기에 구마라습을 앉게 하여 설법을 청하고자 하였다. 구마라습은 사양하면서 말했다.
"나는 아직 대승(大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 자신이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니 여기 머물러 있을 형편이 못 됩니다."
그 때 뜻하지 않게 반두달다(盤頭達多) 대사(大師)가 먼 길을 어렵다 하지 않고 찾아왔다. 이에 왕은 기뻐하며 반겼다.
"대사님이시여, 그 먼 길을 이렇게 찾아와 주셨군요"
달다(達多)가 대답했다.
&한 가지는 제자가 이해했다고 하는 것이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들었고, 또 한 가지는 대왕께서 불도를 특별히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저 먼 곳 에서 달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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