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각현은 구마라습에게
“법사의 해석은 별다르게 의외라고 할 정도도 아닌데 명성이유달리 높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니, 구마라습이 대답했다.
“나의 나이가 많아 그럴 것이오. 훌륭하다고 일컬을 것이 못 되리다.”
구마라습은 뜻에 의심스러운 데가 있으면 반드시 각현에게 의견을 구하여 옳고 그름을 가렸다.
때마침 태자(太子) 요홍(姚)이 각현설법(說法)을 듣고자 승려들을 모아 동궁(東宮)에서 논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구마라습과 각현은 거기서 몇 번인가 문답을 주고받았다.
구마라습이 질문했다.
"어찌하여 사물은 실체는 없고 공(空)한 것이라고 합니까?"
각현이 답변했다.
"여러 가지 미세(微細)한 것이 모여 현상이 이뤄지는 것이고, 현상 그 자체로서는 변치 않는 실체란 없는 것입니다. 곧 현상으로서 존재는 하지만 언제나 실체는 없고 공(空)한 것입니다."
"일체(一切)는 극미(極微)한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에서인데, 현상은 공이라고 밝힌 이상 그 위에 어째서 또 극미한 것이 공이라고 밝히는 것입니까?"
"다른 여러 법사들은 하나의 미세한 것을 분석하고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미세한 것은 상존(常存)하는 것입니까?”
"하나의 미세한 것이 공이므로 여러 가지 미세한 것의 모임은 공이요. 또 여러 가지 미세한 것이 모인 것이 공이므로 하나의 미세한 것이 공입니다."
이 때 보운(寶雲)이 이 말을 번역하였는데,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승려들과 속인(俗人)들은 모두 각현이 말한 '미세한 것은 상존(常存)하는 것이다.' 라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였다.
얼마 있다가 장안(長安)의 학승(學僧)들이 다시 설(說)하여 바로잡아 주기를 청했다. 이에 각현은 말했다.
“무릇 사물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생기지 않고 원인이 서로 모여 생기는 것이다. 어느 세미한 것에 의해 여러 가지의 세미한 것이 존재한다. 이 세미한 것은 그 자체로서 고유한 불변성(不變性)을 가지지 않는 이상 공이다. 어찌해서 하나의 미세한 것이 생존하여 공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을 부정하지 않는 따위로 말할수 있는가.”
이것이 문답의 대의(大意)였다.
그 때 진군(陳郡)의 원표(豹)는 송(宋)나라 무제(武帝)의 태위장사였다.
송나라 무제가 남쪽으로 유의(劉毅)를 토벌할 때 막부(幕府)에 소속되어 무제를 따라 강릉(江陵)에 도착하였다.
각현은 제자 혜관(慧觀)을 거느리고 원표에게 가 먹을 것을 빌었다. 원표는 본래 각현을 공경한다거나 믿는다거나 하는 마음 따위가 없었으므로 소홀하게 대우했다.
각현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물러가려 하는데, 원표가 그것을 보고
“충분히 잡숫지 못하신 것 같군요. 잠시 더 머물러 주시오.”
하니, 각현이 말했다.
“시주(施主) 님이시어, 베푸시는 마음에 한도가 있으십니다. 그래서 준비하신 음식이 다 바닥났습니다.”
원표가 곧 좌우 사람들을 불러 밥을 더 가져오게 하였으나 밥은 역시 남은 것이 없었다.
원표는 그만 기가 죽어 혜관에게 물었다.
“이 사문(沙門)은 어떤 인물이 시오."
"그분의 덕(德)은 기품(氣品)이 높고 속이 깊어 범인(凡人)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분이십니다.”
혜관의 말을 들은 원표는 완전히 심복(心服)하여 태위(太尉)에게 그 뜻을 상신(上申) 하였다. 태위가 함께 만나보기를 원하면서 특별히 높이고 공경하였으므로 수행(修行)에 필요한 물건들을 보내 오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돌연히 태위가 도성으로 돌아가게 되니 각현에게도 함께 돌아가자고 부탁해,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각현은 행동거지(行動擧止)가 깔끔해서 지지한 세속(世俗)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양과 달랐다. 뜻이 맑고 깨끗하며 높고 원
대하여 언제나 고상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경사(京師)의 법사(法師) 승필(僧弼)이 사문 보림(寶林)에게 보내는 글에서 말하기를
“투장사(鬪場寺)의 선사(禪師)에게는 과연 큰 도량(度量)이 있습니다. 마치 천축(天竺)의 왕필(王弼)·하안(何)과 같은
사람으로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인물입니다.”
했을 정도로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보다 앞서 사문 지법령(支法領)은 우전국(于聞國)에서 '화엄경(華嚴經)'의 앞부분 3만6천 게(偈)를 구하였으나 아직 번역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희(義熙) 14년(418)에 오군(吳郡)의 내사(內史) 맹개(孟題)와 우위장군(右衛將軍) 저숙도(叔度)가 각현에게 부탁하
여 번역 책임자로 삼았다.
각현은 손에 범문(梵文)을 잡고, 사문 법업(法業)과 혜엄(慧嚴) 등 100여 명과 함께 도량사에서 번역 사업에 착수하여, 문장과 교의(敎義)가 마땅한가 아닌가를 정하고 중국어와 서역말을 통하게 하여 경전의 취지를 보기 좋게 나타냈다.
도량사에는 아직도 화엄당(華嚴堂)이라는 건물이 남아 있다.
사문 법현(法顯)은 서역에서 구한 '승기율(僧祇律)' 의 범본(梵本)도 각현에게 의뢰하여 진나라 글(晉文 : 중국어)로 번역하
게 하였다. 전후 번역하여 낸 것은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6권과 '이원경(泥怨經)’ 및 '수행방편론(修行方便論)' 등 대개 15부 117권인데 어느 것이나 그 깊은 취지를 밝혀 문장의 뜻을 보기 좋게 나타냈다.
각현은 원가(元嘉) 6년(429)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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