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무참전(景無讖傳)
담무참(景無識), 그는 본래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양탄자를 만들어 그 품삯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문인 달마야사(達摩耶舍), 여기서는 법명(法明)이라고 하며 출가한 사람이 세속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을 말한다.
어느날 담무참의 어머니는 출가한 사람이나 세속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며 유족하게 살아가는 달마야사들을 보고 퍽 부러웠다. 그리하여 담무참을 그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담무참은 겨우 열 살이건만 뛰어나게 총명해서 함께 공부하는
여러 아이들과 주문(呪文)을 외면 경(經)을 하루에 만여 마디나 기억할 수 있었다. 처음에 소승(小乘)의 교리를 배우고, 아울러 오명(五明)의 서적을 닦아, 그가 강설(講說)하는 모습은 정교하고도 치밀하여 그의 웅변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뒷날 백발(白髮)의 선사(禪師)를 만났을 때 선사는 담무참과 교의(敎義)를 논(論) 하다가 담무참이 지금까지 닦아 온 것이 모두 틀렸음을 알았다. 계속 쉬지 않고 논(論)을 다투기 백여 일, 담무참이 날카롭게 어려운 점을 찔러도 선사는 전연 굴복하지 않았다. 드디어 담무참이 선사의 정교하고 치밀한 논리(論理)에 굴복하고 선사에게 물었다.
"도움이 될 만한 무슨 경전(經典)이 없겠습니까."
선사는 그에게 나무 껍질에 베낀 '열반경(涅樂經) 원전(原스님典)을 주었다.
담무참은 그것을 열심히 읽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깨달고 부끄러워 몸을 움츠리며 우물 안 개구리가 대해(大海)를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제자들을 모아 지금까지의 과오를 참회하고 새롭게 대승(大乘)의 가르침만 오로지 구하기로 했다.
스무 살에는 대승과 소승의 경전을 독송(讀誦)한 것이 2백여만어(二百餘萬語)에 이르렀다.
담무참은 주술(呪術)에도 뛰어나 그것을 행하면 반드시 효험이 있어 서역에서는 위대한 주술사(呪術師)로도 일컬어졌다.
어느 때 국왕을 수행하여 산 속에 들어간 일이 있었다. 국왕이 갈증(渴症)을 느껴 물을 찾았으나 물을 구할 수 없었다. 담무참은 남이 모르게 바위에다 국왕의 덕을 찬미하며 주문(呪文)을 외워 물이 솟게 해달라고 했더니 드디어 물이 솟아 올랐다. 그는 “대왕(大王)의 혜택이 신령들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기어이 물기 없는 바위에서 샘이 솟았습니다.”
라고 하며, 왕에게 물을 바쳤다.
이웃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모두 왕의 덕에 감탄하였다.
그리고 때에 맞춰 비가 알맞게 내려 사람들은 생활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왕은 담무참의 도술(道術)에 만족하여 더욱 그를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왕의 대우가 점차 옅어지면서 소홀해졌다.
담무참은 더 오래 머물러 있다가는 마침내 왕의 미움을 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왕에게 하직을 고하고 계빈으로 향했다.
그 때 그는 '대열반경(大涅經)'의 전분(前分) 10권과 '보살계경(菩薩戒經)’ ‘보살계본(菩薩成本)' 등을 가지고 갔다.
그 나라에서는 소승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가 대부분이어서 '열반경' 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쪽 구자국(龜故國)으로 갔다가, 얼마 뒤에 다시 나아가 고장(姑l) 이라는 곳으로 갔다. 여관에서 묵는데, 경(經)의 원전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그것을 베개로 삼아 베고 잤다. 잠을 자다 누가 그것을 당겨 땅으로 던지려는 기색이 있어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도둑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렇게 하기를 사흘밤을 계속한 뒤 방에서 사람이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여래(如來)가 해탈(解脫)한 가르침이다. 어찌 베개로 삼을 수 있단 말이냐.”
담무참은 자신의 밝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겨,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안치(安置)하였다.
밤중에 도둑이 들어와 몇 차례나 그것을 들어 올리려 하였으나 도저히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담무참이 그것을 손쉽게 들어 올리는데 조금도 무겁게 여기는 기색이 없었다. 숨어 있던 도둑이 그것을 보고는 그가 성인임을 깨닫고 모두 모여 와 엎드려 죄의 용서를 빌었다.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渠蒙遜)이 양(凉) 지역을 실력으로 지배하여 왕(王)이라 칭하고 있었는데, 담무참의 명성(名
聲)을 소문으로 듣고 그를 불러 접견(接見)하고는 특별히 정중하게 대우하였다.
저거몽손은 평소부터 불법을 공경하여 널리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생각하였으므로 경전을 번역하고 싶다고 부탁하였다.
담무참은 아직 이 나라 말에 어둡고 통역도 없으므로 표현이 교리(敎理)와 어긋날 수 있다는 생각에 곧바로 번역에 착수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3년 동안 말을 배우고 나서 차차로 처음 부분 10권을 번역하여 필사(筆寫)하였다.
당시에 사문 혜숭(慧)과 도랑(道明)은 하서(河西) 지방에서 뛰어난 존재였다. 담무참이 경전을 설(說)하여 내자 깊이 경
의를 표하고, 혜숭이 범문(梵文)을 이곳 말로 바꿔 필사하였다.
출가자와 세속에 있는 자 수백 명이 모여 종횡(橫)으로 교의의 의심나는 점을 제기하였다. 담무참은 자유자재로 대응하여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물 흐르듯 하는 변설(辯舌)은 표현이 풍부하고 화려하며 주(周密)한 언어를 구사하였다.
혜호와 도랑은 더욱 여러 가지의 경전을 널리 번역해 주기를 청했다. 이어서 '방등대집경(方等大集經)' '방등대운경(方等大雲經)’ ‘비화경(悲華經)’ ‘보살지지경(菩薩地詩經)’ ‘우바새계(優婆塞戒)’ ‘금광명경(金光明經)' '해룡왕경(海龍王經)' '보
살계본菩薩戒本)' 등 60여만 언(言)을 역출(出)하였다.
담무참은 '열반경(星堅經)' 원전의 품수(品數)가 부족하여 외국으로 돌아가서 찾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므로 1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우전(于蘭)에 가 경의 원전 중간 부분을 손에 넣고 재차 고장(姑)으로 돌아와 번역하였다.그 뒤에 다시 사자를 우전으로 보내 찾게 하여 뒷부분도 손에넣었다. 이렇게 해서 뒷부분까지 이어서 번역하여 전부 33권을 만들었다. 위현시(僞玄始:北凉) 3년(414)에 번역을 시작하여 현시(玄始) 10년(421) 10월 23일에 세 질(喉) 모두가 겨우 완성되었다. 곧 송(宋) 무제(武帝)의 영초(永初) 2년이었다. 담무참은 '열반경'에 대하여 말했다.
"이 경의 범문(梵文)은 본래 3만5천 게(偈)인데 여기서 1만언(一萬言) 정도를 생략하고, 이제 번역하여 출간(譯出)한 것은 겨우 1만여 게일 뿐이다.”
저거몽손의 의화(義和) 3년(433) 3월이 되어 담무참은 서역으로 여행하여 다시 '열반경' 의 뒷부분을 찾고 싶다고 고집스럽게 간청하였다. 저거몽손은 담무참이 자기 곁을 떠나려 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남모르게 그를 없애려 했다.
표면상으로는 그가 여행하는 데 필요한 식량을 준비해 주고 노자를 마련해 주는 등 마음을 썼다.
마침내 출발하는 날, 담무참은 눈물을 흘리며 제자들에게 이별을 고하면서
"나에게 전세의 업인(業因)에 대한 과보(果報)를 받을 시기가온 것 같다. 아무리 뛰어난 성인이라 해도 구제할 수 없는 일이다.
본래 마음에 맹세한 일이고, 아무래도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말하고는 출발하였다.
과연 저거몽손은 자객(刺客)을 보내 도중에서 담무참의 목숨을 빼앗게 하였다. 그의 나이 49세였는데, 그 해는 송(宋)의 원가
(元嘉) 10년(433) 이었다.
출가한 스님이나 재가(在家) 신도나, 멀리 있는 자나 가까이 있는 자나 모두 애석해 하였다.
그 뒤로 저거몽손을 좌우에서 섬기는 사람들은 늘 대낮부터 귀신들이 칼을 뽑아 들고 저거몽손을 공격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그러다가 4월이 되어 저거몽손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고 결국 죽었다.
전에 담무참이 고장(姑藏)에 있을 때, 장(張)의 사문인 도진(道進)이 담무참에게 보살계(菩薩戒)를 받겠다고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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